해발 13,779피트 준봉

정산엔 만년설, 폭풍우

그렇게 만나 보길 고대했던 그랜드 티턴(Grand Teton)은 오늘도 여전히 돌아 앉은 새색시의 뒷모습처럼 구름에 가려 제 모습조차 허락치 않고 있다. 티턴의 산자락은 무성한 한여름의 숲이지만 10,000 피트 위는 깎아지른 암봉의 연속이다. 뉴욕한미산악회가 기획한 이번 원정산행에 재미대한산악연맹에서는 최동백 부회장과 기술이사인 나, 이렇게 둘이서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고산과 암벽이라는 두 개의 난제를 가진 이번 등반을 위해 남가주 최고봉 샌 고고니오산를 오른다, 유튜브 영상으로 공부를 한다 하며 나름 준비한다고 했건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우리를 가로막는 건 예상치도 못했던 비와 짙은 구름이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피해 천막 속에 웅크려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날씨가 다시 좋아진다고 해도 정상의 암벽 구간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만약 암벽이 젖어 있거나 얼음에 덮여 있으면 안전 문제로 정상을 오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원정을 위해 뉴욕한미산악회는 오랫동안 주말마다 모여 암장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모두들 바쁜 생활에서 어렵사리 시간을 냈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간은 일주일 남짓. 이 기간동안 날씨가 좋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번 등반을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다.

도착한 다음 날도 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하지만 산 아래 캠프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이 산을 배우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중산행을 감행한다. 다행히도 빗줄기는 가늘어서 레인 재킷을 입고 오르기에는 무리가 없다. 비에 촉촉히 젖은 숲이 우리를 반긴다. 계곡물도 며칠 새 많이 불어 숲은 몰라보게 풍성해진 느낌이다. 어느 정도 올라 낮게 깔린 구름층을 지나면 맑아 지길 기대했지만 정상은 여전히 짙은 구름이 가려져 있고, 빗방울은 어느새 진눈깨비가 되어 얼굴을 때린다. 공기도 차가워지고, 사방의 안개도 점점 더 짙어 진다.

트레일은 얇게 쌓인 눈으로 미끄러워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돌아 내려가기로 한다. 하지만 돌아선 곳이 9,500 피트 정도이니 출발하면서 계획했던 정상 아래의 바로 밑 전진 캠프에도 못 다다른 것이다.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하릴없는 일이다. 맑은 날이었다면 멀리 동남쪽으로는 콜로라도에서 달려온 로키산맥과 발 아래 잭슨홀 평야를 구불구불 휘감아 흐르는 스네이크강이 빚어내는 장쾌한 파노라마가 일망무제로 펼쳐질 터였다.

삐죽삐죽 솟은 준봉들의 고도감에 취해 미쳐 깨닫지 못했는데, 산에 오르고 나서야 그 부피감이 느껴지다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의 고산과 비슷하지만, 애스펀과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들이 풍성하니, 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 구름이 좀 걷히고 해가 간간히 나와 날씨가 좋아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대원들은 다시 도전에 나선다. 이번엔 구름과 안개가 없어 훨씬 더 걷기가 좋다. 웅장한 티턴의 봉우리들이 그 자태를 보여주니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거대한 암봉과 그 사이사이 연중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지대가 웅장함을 더한다. 어느새 그저께 올랐던 곳을 지나 약 10,000피트에 이르러 고개를 드니, 그제서야 오매불망 고대했던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코발트빛 하늘을 배경으로, 희끗희끗 화강암을 드러내며 하얀 눈고깔을 쓴 티턴의 기세가 대원들을 압도한다.

여기서 2,000 피트는 그럭저럭 가파른 너덜지대를 오를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로프가 필요한 암벽등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바람과 추위에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올라오다가 만난 몇몇 가이드 등반팀도 결국 마지막에서는 등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쉽고도 원통하지만 하는 수 없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 웅장한 암봉과 산세가 머리 속에 계속 아른거린다.

산 아래 캠프에 도착해 최부회장과 마주하고 섰다. 결정을 할 때가 된 것이다. 뉴욕팀은 일정을 길게 잡았으므로 앞으로도 이삼 일을 기다리면서 정상을 노려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정이 그렇지 못해 날씨가 호전되길 기다릴 여건이 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뉴욕팀의 건투를 빌며 엘에이로 발길을 돌렸다.

와이오밍에서 엘에이까지는 운전시간만 16시간이 걸린다. 돌아오는 내 입가 미소가 흐른다. 비록 산은 내 등반을 허락치 않았지만 티턴은 좋은 추억과 친구들을 선사해주지 않았던가. 아침마다 우리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어준 뉴욕한미의 형수님들, 비를 피하기위해 낑낑거리며 천막을 치고, 캠프장 주변에서 땔감을 모아 큰 캠프 파이어를 만든 또래의 친구들. 무료한 시간에 암벽감각이나 다듬어 보자며 볼더링을 즐기던 기억. 티턴의 정상 암벽 등반구간의 기상 상황을 가정해보며 열띠게 최고의 등정 방법을 토론하던 기억들. 이 모든 것이 내 앞에 서있던 거대한 티턴의 암봉과 섞여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티턴, 고맙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 다음엔 꼭 멋진 등반을 허락해주길.

후기:
이후 뉴욕한미산악회의 박회장에게서 결국 한 팀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두 번 더  등정 시도를 했는데 첫 번째는 강풍에 후퇴했고, 두 번째에서야 잠시 기상이 좋아진 틈을 타 등반 상황이 더 나은 ‘UPPER EXUM’ 루트를 통해 올랐다고 한다. 팀의 강한 의지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앞으로의 멋진 합동등반을 생각해보며, 뉴욕한미팀에게 찬사를 보낸다.

글.사진 크리스 주 연맹 기술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