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 드래곤테일 피크 등반기

“야, 왼쪽은 버리고 오른쪽으로 올라가”

유동혁(시애틀) 등반대장이 리드를 하고 있는 박상훈씨에게 소리친다. 용의 등비늘처럼 잔뜩 날이 선 9부 능선을 따라 내딛는 걸음걸음이 아슬아슬하다. 왼쪽으로는 빗자루로 쓸어내린듯한 급경사의 하얀 만년설이 천길단애를 이루고 있다. 믿을 것은 오직 한 손에 쥔 피켈과 두 발에 덧씌운 크램폰이 전부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다리는 떨리니,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지경이다.

대원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멀리 벼랑 끝으로 ‘드래곤테일 피크(DragonTail Peakㆍ8842ft, 2695m)’정상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떨어져 있고, 왼쪽 건너편에는 ‘리틀 안나푸르나’가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발 아래론 아이솔레이션 레이크가 눈에 뒤덮여 눈썹달처럼 가장자리만 옥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 아래로 트랭퀼ㆍ퍼펙션ㆍ인스퍼레이션ㆍ비비안 레이크 등 수많은 호수들이 눈 속에 감춰져 있다. 이름하여 ‘매혹의 트레일(Enchantment Trail)’, 빙하에 깍인 화강암 준봉들 사이로 수정같은 호수들이 발길을 끄는 ‘알파인 파라다이스’다.

지난달 중순 재미대한산악연맹(회장 허훈도)의 연례 행사인 ‘제8차 명산순례’ 등반에 기자가 동행했다. 매년 연맹의 전국 지부 및 가맹산악회의 회원들이 합동산행을 통해 유대강화와 산악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다. 2009년 그랜드 티턴(와이오밍)을 시작으로 레이니어(워싱턴)ㆍ샤스타(캘리포니아)ㆍ팀파노고스(유타)ㆍ프레지덴셜 트래버스(뉴햄프셔)ㆍ휘트니(캘리포니아)ㆍ후드(오리건)에 이어 올해의 대상지는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 캐스케이드 산맥의 드래곤테일이다.

​이번 등반대의 참가자는 72세의 명완진(시카고)씨를 비롯해서 71세의 한상기(조지아)ㆍ홍종만(뉴욕), 70세 이주익(시카고)씨 등 왕년의 내로라하는 산악계 대선배들이 대거 참여했다. LAㆍ오리건ㆍ뉴욕ㆍ버지니아ㆍ시애틀ㆍ시카고 등 원근 각지에서 모인 대원이 모두 26명, 최태현 한국지부장도 불원천리 달려왔다. 산이 고팠다기보다는 사람이 그리웠을 것이다. 만나는 순간 단번에 혈기왕성하던 시절로 되돌아갔으니 말이다.

​11일 현지 시애틀산악회에서 준비한 통나무 캠프장에서 LA갈비와 소주로 회포를 푼 대원들은 이튿날 트레일헤드로 출발했다. 시즌 개방을 며칠 앞둔 터라 예정에 없던 4마일(6.5km)의 비포장 트레일이 더해졌으니 시작부터 난관이다. 막영장비와 취사도구, 크램폰과 피켈ㆍ안전벨트 등 등반장비, 우모복ㆍ고어텍스 재킷에다가 사흘치 개인식량까지 짊어지니 40파운드(약 18kg)를 훌쩍 넘긴다. 하지만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길 옆으로 활짝 핀 보라색 루핀, 시야를 압도하는 삼나무숲이 잠깐씩 피로를 씻어준다.

보라색 루핀이 청량감을 더해주고 있다.
드디어 본격적인 트레일에 들어선다. 주차요금격으로 퍼밋을 차량 대시보드 위나 룸 미러에 걸어두거나, 추후 봉투에 5달러를 넣어 레인저스테이션으로 보내야 된다.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들 즈음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행동식으로 요기를 한 대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1시간 간격을 두고 출발했다. 조금 전 지나간 공원 레인저아가씨의 당찬 엄포(?) 때문에서다. 한 그룹은 12명을 넘을 수 없고, 그룹 간 거리도 1시간 차를 두어야 된단다. 트레일의 훼손방지와 식생보호를 위한 조치라며 이를 어기면 티켓을 끊겠단다. 이 경고가 절대 엄포로 끝나지 않음을 이미 수차례 경험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분명히 중간에서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며 우릴 기다릴 것이라고 누군가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 대꾸도 없다.

​몇 년 전 4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 본토 48개주에서 제일 높은 마운트 휘트니(1만4505ft, 4421m) 등반 때의 일이다. 새벽 2시에 출발한 우리 일행 뒤로 2시간여의 거리를 두고 불빛 하나가 계속 따라 오더니, 거의 다섯 시간만에 우리를 만나서 한다는 말이 ‘퍼밋(입산허가) 좀 보자’였다. 턱수염에다 낡은 배낭을 멘 후줄그레한 차림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파크레인저였다. 기자는 레저 담당인지라 동네 낚시터에서도, 북부 캘리포니아 멘도시노 해변에서 전복을 딸 때도, 세코이아 국유림에서 사냥클럽 취재 때도 그들을 만났다. 총기를 다루는 사냥터에서는 차에서 내리면서 점퍼를 제쳐 허리에 찬 권총에 아예 한 손을 걸고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러내리도록 걸었지만 얼마나 더 올라야할 지 가늠이 안된다. 너덜지대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목적지라면 얼마냐 좋으랴. 언제나 그랬듯이 눈에 보이는 정상은 또 다른 정상으로 이끄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드디어 계곡을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섰다. 워싱턴주의 원시림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동네 공원 레인저도, 사냥터의 수렵감시인(Warden)도 사법권이 경찰과 동일하게 주어진다. 관할 구역이 다를 뿐 경찰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시작부터 껄쩍지근하다. 예정에 없던 4마일이 더해진데다 예비 범법자 취급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모두 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자면 해질녘이 될 것이다.

다시금 4.5마일의 트레일이 시작됐다. 전봇대처럼 수십 미터 높이로 쭉쭉 뻗은 삼나무가 이국적인 정취를 안겨주지만 머지않아 이 삼나무가 엄청난 장애물로 다가온다. 강수량이 풍부하니 나무 뿌리가 깊지 않은 데다 강풍이 겹쳐 쓰러지거나 꺽여진 나무들이 수도 없이 트레일을 가로 막고 있다. 밑으로 기어야 하는 림보와 타고 넘어야 하는 허들까지. 나무 생김새를 보아하니, 어릴 적 공사장에서 비계로 쓰이던 나무와 똑같다. 굵은 가지 하나 없이 이쑤시개마냥 똑바로 자랐다.

눈 녹은 물이 세찬 계류를 이루고 있다. 숨을 멈추고 1/8초의 느린 셔터로 찍으니, 그 느낌이 더해진다.

*드래곤테일 피크는

북미 태평양 연안 오리건과 위싱턴 주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캐스케이드 산맥의 노스 캐스케이즈(North Cascades)에 있는 봉우리들 중의 하나다. 이 일대의 가장 큰 호수 중의 하나인 콜척 호수에서 수직으로 3242피트 솟아 있다. 상록수림과 호수, 화강암 준봉들로 워싱턴 주의 자연을 대표하는 경치 중의 하나로 꼽힌다. 왼쪽으로 콜척 빙하를 사이에 두고 콜척 피크(8705ft)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 겨울 포틀랜드의 한 산악인이 이곳에서 등반 중 실종되기도 하는 등 전문산악인들 사이에서도 난이도를 중상급으로 친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에 등반한 것으로 한국 산악월간지 ‘사람과 산’ 6월호에 게재됐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