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 드래곤테일 피크 등반기

등반에 성공한 산악인들이 멀리 정상을 배경으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 빨간 재킷이 필자.

지리하게 이어지던 트레일은 스튜어트 산으로 가는 길과 나뉘어지는 세 갈래 길에 이르렀다. 초입부터 한두 개씩 보이던 스노패치(잔설)들이 이제는 여기저기 눈길 가는 곳마다 널렸다. 화살표를 좇아 왼쪽 계곡으로 나서니, 화강암 너덜지대 너머로 드래곤테일과 콜척 피크가 봉우리 끝을 살짝 드러낸다. 바위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 계곡물을 제각기 수통에 담는다. 눈 녹아 흘러내린 물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물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다.

​길은 제법 경사를 높여가며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오래 전 산불이 다녀갔는지 하얗게 뼈만 남은 나무들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눈사태에 밀렸는지 나무들이 아래쪽으로 죄다 누워있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묵묵히 걷던 일행에게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트레일 초입에서 만났던 레인저 아가씨다. 보이스카우트처럼 반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인데, 손에는 삽을 들고 있다. 시즌 오픈을 앞두고 트레일을 보수했나 싶었더니, 야외 화장실을 청소하고 가는 길이란다.

아침에 만났던 레인저 아가씨가 임무를 마치고 하산하고 있다. 들고 있던 삽에 대해 물었더니, 등반 시즌을 앞두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내려 간단다. 산다람쥐가 따로 없다.
세상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화장실이다. 캐스케이즈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라니. 그 레인저 아가씨가 청소했을 곳이다.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하이킹하며 화장실 청소 두어 곳 하고 월급을 챙긴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중간에 놀다가 돌아가도 누가 감독하러 올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생글거리기까지 하며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인사까지 한다. 헤어지려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지아주에서 온 한상기 선배가 나선다. 만질 수 없는 꽃은 사진으로나마 남겨야 된다나. 레인저와 나란히 한 컷. 이후 그는 뒷풀이 차 들른 독일마을(Bavarian village)에서도 사진사랑에 빠졌다. 젊은 웨이트리스가 좋은 건지 사진이 좋은 건지.

​걷다 쉬다를 반복하던 끝에 마지막 팀이 드디어 호수 끝자락에 이르렀다. 트레일 헤드를 출발한 지 5섯 시간만이다. 타원형 호수 반대편으로 드래곤테일 피크와 콜척 피크가 우뚝 솟아 위용을 뽐내고 있다. 드래곤테일 왼쪽에는 꿀르와르, 오른쪽으로는 콜척 피크와의 사이에 여름에도 녹지 않는 수천 피트의 콜척 글래시어(빙하)가 호수에 곧장 내려 꽃히고 있다. 여름이면 옥색으로 빛났을 호수는 하얗게 얼어 있다. 살풍경이 따로 없다.

고산 캠프로 쓰일 호숫가, 중앙의 골짜기 ‘콜척 패스’가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한밤중에 나와 별궤적을 같이 담았다.

마음 같아선 얼음 위로 건넜으련만. 다시 호수 가장자리의 바위를 타고 넘는 1시간여의 고행이 끝나고서야 모두 캠프장에 도착했다. 오후 6시 30분, 아침에 배낭을 멘 지 10시간 만이다. 한참을 다진 눈 위에 텐트를 설치하고 누룽지를 끓이니 비로소 막내 크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베이글에 크림치즈, 미역국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9시를 넘긴다. 하지만 바깥은 여전히 초저녁처럼 훤하다. 위도가 높아서 해가 길단다. 이후 한동안 두런두런 이어지던 얘기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드러렁드러렁 코고는 소리가 이어진다.

다음날 새벽 4시, 기상소리가 나기 무섭게 텐트마다 부산스럽다. 냉기와 코골이 소리에 등반 걱정이 겹쳤으니 잠을 설쳤을 테니 기상 소리만 기다렸을 것이다. 급히 드라이푸드와 우거지국으로 아침을 떼우고 텐트 밖으로 나선다. 푸르스름한 여명에 수직으로 솟은 봉우리는 이름처럼 섬뜩하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용의 꼬리’라니, 설악산의 ‘용의 이빨 능선(용아장성)’사촌뻘인가. 하루만에 3000피트 이상 올라야 하고, 어떤 구간은 경사 70도에 육박하는 설벽이니 기가 질린다.

전날의 길고 길었던 트레일에다 등짝 시려운 밤을 보냈으니… 새벽 4시에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이 야속하다. 설사면이지만 밤 사이에 얼어붙어 출발부터 크램폰을 착용해야 한다.

레이니어산(1만411ft, 4392m)을 45번 등정하고, 분화구까지는 100번도 넘게 올랐다는 베테랑 유동혁 등반대장이 나섰다. 누구는 장비가 부실하고, 누구는 경험이 부족하고, 누구는 체력 저하를 이유로 강퇴되거나, 기권해서 16명의 대원이 추려졌다.

드래곤테일 아랫자락의 호숫가를 지나 길고긴 꿀르와르(산중턱의 협곡) 아래에 섰다. 지난 겨울 눈사태를 이기지 못한 삼나무들이 나무젓가락처럼 무참하게 꺾이거나, 아예 아래쪽으로 누워서 자라고 있다.

일행은 추락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다시 3개 조로 나뉘어 아스가드 패스(Aasgard Pass, 공식적으로는 Colchuck Pass, 7841 ft, 2390m)로 이어지는 설벽에 붙었다. “척,척, 푹”크램폰과 피켈 소리에 거친 숨소리까지 더해진다. 숨에 턱에 닿을 어느 순간 앞서 가던 크리스가 외친다. “누굽니까, 이거 크림치즈 방귄데.”그러자 앞에서 최태현 지부장이 계면쩍게 대꾸한다. “아냐, 나는 누룽진데”. 일행은 웃느라 잠시 걸음이 더뎌진다.

콜척패스 초입에서 대원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잠시 쉬는 틈에 고개를 돌리니 캐스케이드 산맥의 장쾌한 파노라마에 아침해가 비친다. 눈 밖으로 드러난 너덜지대 등에서 두어 차례 숨을 돌린 대원들이 드디어 패스에 올라섰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캠프에서 보이지 않던 설사면이 다시 오른쪽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누가 속인 것도, 내가 속은 것도 아닌데, 힘이 빠지긴 마찬가지.

70대의 홍종만ㆍ이주익ㆍ한상기 씨 등 선배들도 거뜬해 보이는데, 누가 포기할 수 있으랴. 게다가 한상기 씨는 눈 덮인 너덜지대에서 발이 빠진 후로 발목이 심하게 부은 상태다. 길고도 아슬아슬한 설사면 트래버스를 두어 차례 더 하고서야 정상이 보이는 고개에 섰다. 정상은 손가락 두 마디밖에 떨어져 있지만, 두 시간이 더 걸릴 지 가늠이 안된다.

아스가드 패스(콜척 패스)에 올라선 대원들. 크리스 주, 문진성, 한상기, 최태현(왼쪽부터). 최태현 대원은 한국에서, 한상기 대원은 조지아주에서 온 베테랑 산악인들이다.
에베레스트의 셰르파를 연상시키는 포스의 최동백 연맹 부회장.
멀리 정상을 앞두고, 장비 점검을 하는 대원들. 중앙 왼쪽 멀리 보이는 산이 마운트 후드.
돌아서니, 칼날 능선너머로 캐스케이즈 산맥의 파노라마가 장쾌하다.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 천길 낭떠러지가 등 뒤에 도사리고 있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도전자 16명이 모두 승리자가 됐다.

올랐으니 내려가야 하리, 정상은 다시 누군가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산길은 언제나 그랬듯이 살 떨리는 순간이다. 몇 명이 미끄러지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고서야 대원들은 다시 캠프로 귀환했다. 유명 산악인 에드 바이스쳐는 말했다. “정상은 선택이지만 살아 돌아오는 건 필수(Getting to the top is optional, getting down is mandatory)”라고.

산 아래 ‘독일마을’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 ㅋ
필자, 허훈도 재미대산련 회장, 최동백 부회장, 이창모 전 회장 (왼쪽부터)